고향14 어머니에 관한 시/전상순 낡은 것에 대한 향수 / 전상순 설거지통이 오래전에 금이 갔다 조금만 낡으면 새것으로 금세 바꾸는 세상에 돌연변이처럼 보이는 낡은 통, 엄마 생각이 났다 무엇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고, 당신은 뼛속까지 비어도 타인을 풍족하게 하는 분 매 순간 최선을 다하시는, 올곧고 당당하며 지고지순한 사람이다 엄마를 떠올리면 조르주 퐁피두 전 프랑스 대통령이 마지막 순간에 남긴 한 줄의 말이 생각난다 '나는 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이도 맞지 않고 쪼개진 가위, 새 가위로 바꿔 드리면 또 딴 데 쓰는 분이다 육신이 닳아 더는 일을 못 하게 되었을 때조차 보통 사람 이상으로 움직이는 분 플라스틱과 플라스틱이 맞서서 버티다 결국 어긋나, 설거지통에 물이 샌다 담수湛水가 깨진 틈새로 줄줄 떨어지니, .. 2024. 5. 28. 고향 2024. 5. 12. 봄여름가을겨울 시 봄엔 / 전상순 봄엔 이른 아침 등굣길에 다리에 달라붙은 밀 물방울 터느라 분주한데 코 흘리는 남학생까지 따라와 뭐 때문인지 묻지도 않은채 마냥 다시 냇가로 머리카락 날리며 도망치네. 여름엔 / 전상순 여름엔 황토물 타고 미꾸라지가 우리 집앞까지 와줘 맨발로 마중 나간 주전자가 제일 크게 웃었네. 가을엔 / 전상순 가을엔 한 고랑 고구마 줄기같이 이어진 언니 오빠 동생이 모두 들녘에서 분주한데 어머니는 쓰러진 벼 닮은 나를 만날 공주대접 하시니 나락 위 눈초리 올라간 도마뱀도 흘깃하며 지나가네. 겨울엔 / 전상순 겨울엔 오빠가 까불며 만든 스케이트 나도 좀 타보자고 신나하는 순간 얇은 얼음판을 기차게 알아내 퐁당퐁당 잘도 빠졌지 밤새도록 언 손발에 해삼이랑 담배알맹이 싸고 잤지. 시집[오늘에야 알았네] 2022. 10. 24. 어머니에관한시 / 전상순 설 가까이 / 전상순 그립다 하니 숨지 못하고 보고 싶다 하니 친구 새털구름이라도 내보내고 이마 고랑 패도록 바라만 봐도 좋다 하니 조금만 스쳐도 환한 빛 띠는 저 대지 위 해 하나 떠 있다 한파를 피해 움푹 팬 논에서 친구 동네로 설 떡 하러 간 엄마 오기를 기다리던 겨울이어도 봄 같던 그때가 생각나더라. 2022. 1. 22. 내가 간 곳/전상순 내가 간 곳 / 전상순 내가 간 곳은 꽃과 곡식이 풍성한 고향집 차분한 아침 벼와 산이 안개를 끌어안고 마을까지 내려온 곳 냇가에 물고기들 위 아래로 몰려다니고 나는 작은 뜰채를 들고 물고기를 따라 움직였네 물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어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소소한 추억들이 음악처럼 따라왔네 그 추억들을 내 안에 꽁꽁 가두었네 자물쇠로 잠갔네 추억이 향기처럼 퍼져 내 마음 안에서 이리저리 쏘다니도록. [시적치료-더 큰 아름다움] 중에서 2017. 11. 2.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