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순의 시 세계
역지사지의 철학과
자신에 맞는 시찾기의 구현(具現)
(수필가, 문학평론가 영현 정영미)
전상순의 시(詩) 백 편을 감상하고 났을 때 처음 떠오르는 느낌은 온순한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시 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부드럽고 자신도 모르게 다음 시로 내려가면서 그렇지, 그런 거야 하는 식으로 응(應)하고 있음을 본다. 아마도 시인께서는 천성이 유순하기도 하지만 문학을 통해 혹은 진실한 종교인으로 보드라운 흙살이 되었지 싶다. 거기다 시를 처음 써보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시의 흐름이 매끄러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렇다. 자칫 시의 기본인 함축과 비유 (implication, figure of speech)를 덜한 게 아닌가 할 수도 있는데 다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응축과 상징이 중요하긴 한데), 자신만의 옷 색깔이 있다면 오히려, 독자와의 교감(交感)을 높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인께서 쓰신 백 편의 시 중에서 함축적이거나 사회비판적인 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꽤 상징성을 띈 <백일홍>,<청단풍>, <은난초>, <바람꽃> 등도 있고 <일몰>,<벌>, <무궁화>,<국경에서 그리고>는 냉정한 현실을 개탄했다.
하지만 전상순의 이번 시집에서는 (상징과 응축을 덜하면서도) 깊은 사유를 매끄러운 물 타기와 같은 시선(詩線)으로 잘 보여주었다고 본다. 부드러우면서도 격조 있는 가락, 통사구조의 원활함, 이런 것들이 “자신만의 시찾기 구현(具現)”에 근접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랬기에 호응했고 감흥을 받은 게 아닐까. 이제 그가 시집명(詩集名)에서도 말한 <오늘에야 알았네>처럼 어떤 성숙함에 이르렀는지에, 포커스(focus)를 두고 평(評)하고자 한다.
1. 자아성찰 (自我省察)로서의 표현
거론한 바와 같이 시인은 온순한 사람인데도 끊임없이 삶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다. 그의 삶 대부분이 종교적인 자세와 성직자적인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기도 하겠지만 작은 일상부터 참되고 바르게 살려는 흔적이 강한 것 같다.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세심하게 마음을 주면서 나 자신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지도한다는 이 말은 스스로가 감독하지 않으면 언제고 튀어오를 공과 같은 것이 욕구(欲求)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친 세상을 사는 데는 강철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부드러운 것이 필요한 세상이라고 믿고 있는 시인이다. 이 믿음은 그의 성찰적 시에서 드러나며 좀 보기로 한다.
세상과 차단해
정신을 어지럽히는 일에서 빠져나오고도 보금자리에 들면
가슴속에 냉기를 품은 지난 일들이 부끄러운 법이다
마음은 나무 밑 같으리라
하늘 뜻에 어긋나는 의도 아니었다고 치부해버려도
왜 그랬을까 최선이었을까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몸은 성전이라 했는데
누가 건드리기라도 할라치면
전투할 태세로 대포 구멍을 준비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한동안의 몸은 성전 아닌 성벽이 아니었는지
제 마음을 죄의 노예처럼 맘대로 부려 먹진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리고서 고종명考終命 하나 받는 꿈 꾸어볼 일이다.
<고해> 전문
이렇듯 시인은 거친 “세상과 차단”하고 싶을 만큼 온유하고 유순한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시(詩) <고해>의 표현을 보면 “보금자리에 들면 / 가슴속에 냉기를 품은 지난 일들이 부끄러운 법이다” 며 생활에 있어서의 조그마한 실수나 그로인한 상대와의 미편함일지라도 고뇌하며 문학이라는 집을 통해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성찰적인 시들은 위의 작품 외에도 <용서>, <다시 새롭게 >, <예민한 마음>등에서도 더 진실하게 자신을 지도하고 있다. 물론 이 돌아보기 혹은 자아성찰이 수많은 역사 현장에서 기꺼이 희생을 한 선배 문학인들처럼 시대의식이나 사회현실에 대한 소명의식으로서의 성찰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정서가 각박하고 피폐해진 이때에 바르고 성숙한(부드러운) 인품으로의 성찰은 주변에 가로등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뜻 깊다고 보는 것이다. 이 시집을 감상하는 필자(筆者)역시도 시를 감상한 후에 마음이 차분해짐은 물론 특별히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낯설지 않고 가로등 밑 벤치에서 좀 쉬었다 나온 느낌이었기에 그렇다고 본다.
2. 상대를 배려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철학
( Put yourself in an other's shoes)
시인께서는 자아성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적(利他的 altruistic) 삶을 살고 있다. 시인 스스로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은연중에 비친 시의 표현들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려의 자세인 타인에 대한 포용성(包容性)은 딱히 물질적인 혜택이거나 실천적 행위로써의 도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시를 통해 보인 시인의 인품은 경제적 지원(支 援,support ) 이상의 마음 적 배려를 의미하며 관용(寬容)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한 시인 의식이 내포된 시들을 보면 이렇다.
편했다면
고생 좀 해도 감수할 것
누렸다면
억울해도 좀 참을 것
행복했다면
좀 괴로워도 넘어갈 것
<그랬다면 > 일부
낙타 발자국이
사막의 바람에 다 덮이듯
시간과 함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무언가에 대해
모르는 사연에 대해
알고 싶어도
다 물을 수는 없다
때로는, 캐묻지 않는 것이
더 큰 배려로 다가와서
존중을 사랑하는 모래는
가만히 물음을 덮어둔다.
<묻고 싶어도 > 전문
쓰레기 버리러 가든
어디를 가든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을 보거든
마음 상해하지만 말고
보기 싫어도 웬만하면 눈감아줘라.
<또 하나의 지혜> 전문
이처럼 이타적(利他的)이면서도 남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 그의 시(poem)를 보게 된다. 선천적인 착함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남다른 종교의식과 삶에서의 보람을 자신보다는 남을 위함으로 해서 얻으려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럴 때 돌아오는 것은 고통과 힘듦 뿐이겠지만 그는 그것을 즐기며 오히려 행복해 하고 있다. 위에 소개한 시에서도 “때로는 캐묻지 않는 것이”, “웬만하면 눈감아줘라”고 한 것처럼 역시나 배려하는 자세이다. 이렇게 했을 때 서로간의 관계가 원만할 수 있으며 정신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런 것으로 봐서 전상순 시인은 깊은 내면을 가졌으며 그 내면이 한없이 부드러워 날카로운 현실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물건은
조그마한 것도 무겁게 느껴지고
사랑이 가득한 것은
제 힘에 겨워도 힘든 줄 모르고 지냅니다
내 가슴에 사랑이 없을 때
작은 일에도 내 몸은 더욱 아팠습니다
<다시 사랑할 때> 일부
어쩌면 시인의 궁극(窮極)은 이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사회를 감싸 안는 것이 시인으로서 혹은 종교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며 역사적 사명감을 다한 희생자들 못지않은 애국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보다 더 배려하고 따뜻한 포용력(包容力)을 보여줌도 이 각박한 시대에 문학인의 책무였을 것이다. 그래서 자아를 반성하고 성숙한 삶을 지향한 그는 인격적인 도야를 하고 있음이 보인다. 혹시나 이 착한 성품이 자신의 인격형성에만 국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 섞인 물음을 들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현실은 냉혹하고 이기적이며 향기도 수분도 없는 메마른 공기뿐이다. 이런 각박한 현실에서 고운 성향을 지키고 있다는 것도 족(足 )할 일이지만 그는 언제나 상대방을 생각한다.
-'오늘에야 알았네' 시집 평론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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